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가스실 ===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 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 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 >- [[치클론 B]]를 이용한 처형 실험 직후에 대한 회스 중령의 고백록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uschwitz_I_death_block_11_04.jpg|width=100%]]}}} || || 아우슈비츠 11번 구역 사진. 벽면에 보이는 길고 하얀 자국들은 최후까지 살고자 몸부림쳤던 희생자들의 손톱자국이다.[* 실제로 유튜브 댓글에서 어떤 한국 사람이 저곳에 가서 손톱자국이 남는지 실험해보려고 직접 가서 손톱으로 긁고 긁고 손이 아플 때까지 긁었지만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고통속에서 죽기살기로 참혹하게 긁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벽을 자세히보면 손톱 자국이 남은 위치는 사람의 팔이 닿는 위치인데 검은색으로 변색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이 얼룩들의 정체는 '''[[피]]. 한마디로 손톱이 빠질 때까지 벽을 긁었다는 뜻이다.'''] || ||[youtube(rZMuLU94HTc?si=1z4BrfXH8nKdnEwp)] || || 네메시 라슬로 감독의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 의 도입부에서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비르케나우의 가스실 시퀀스. 열차로 이송되어 비르케나우에 도착한 희생자들이 존더코만도들의 안내를 받아 수용소 내로 들어오면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장병들은 거짓말로 그들을 안심시킨다.[* 우선 위생을 위해 샤워를 실시한 후, 각자의 직무능력에 따라 적합한 일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안내한다. 샤워를 마친 후 본인의 옷을 찾을 수 있도록 옷걸이 번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통해 별 일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머뭇거리는 희생자들에게는 식사로 나온 [[수프]]가 식고 있다고 재촉한다. 물론 이렇게도 진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친위대원들이 몽둥이질을 가하면서 그들을 강제로 가스실에 밀어넣는다.] 그동안 희생자들은 탈의하고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 수용된다. 문이 닫히는 즉시 [[치클론 B]] 가스가 투입되며, 안에서 사람들이 가스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동안 존더코만도들은 희생자들의 짐을 모아 정리한다. || 최초의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 살해도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는데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치클론 B를 투약했다.(출처 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었고 나치 친위대(슈츠슈타펠)은 이전에 쓰던 차량 엔진 배기 가스 방식 가스실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간편하며 싼 값에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대부분의 절멸 수용소들은 자동차 또는 전차에서 떼어 온 [[엔진]]을 공회전시켜 나오는 일산화탄소를 이용해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이 문서 위쪽 표에 나온 다른 수용소들의 구조에서 가스실 뒤편에 처형용 엔진이 있는게 이 때문. 치클론 B가 사용된 것은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 둘뿐이다.] 이후 실험을 했던 11번 구역은 몇 가지 개조를 거친 뒤 가스실로 사용했지만, 규모가 작아서 대량 학살을 원했던 슈츠슈타펠은 1942년부터 비르케나우에 빨간 집이라 불리는 벙커 1과 하얀 집으로 불리던 벙커 2에서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에 슈츠슈타펠은 기존에 있던 2번 화장장(Crematorium 2)를 개조해서 가스실로 활용했고, 단 반 년 만에 비슷한 구조의 가스실을 3개 더 만들어 이곳에서 대량 학살을 벌였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작은 공장처럼 생겼고 지하에는 샤워실처럼 꾸며진 가스실이 있었다. 나치는 가스실을 샤워실처럼 꾸미고 희생자들에게 지금부터 샤워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스스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치와 SS는 철저할 정도로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했는데, 수감자들의 죄수복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죄수복들은 별다른 절차 없이 신규 입소자에게 지급되었다. 초기에 학살을 시작할 시기에는 수용소 기간병들이나 [[카포]]들이 강제로 옷을 벗기고 가스실에 밀어넣었지만, 알다시피 이건 다수에게 해야 하는 데다 저항도 발생해서 대단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다 어느 날 '피해자들이 스스로 죄수복을 벗고 잘 개켜서 한곳에 모아준다면 매우 효율적이고 일사천리로 학살 작업이 진행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았고, 아주 악마적인 창의력을 동원해 위와 같은 탈의실로 위장된 학살준비실을 건설한다. 가끔 눈치빠른 희생자가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시 입을 수 없는)옷을 벗어둔 옷장을 잘 기억해 두라는 나치의 거짓말에 속아넘어 갔다. 그야말로 편의주의와 잔인무도함의 결합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물인 셈이다. 다만 이때도 반발은 있어서 한 수감자가 막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에게 학살의 진실을 알려주는 일도 있었고[* 이 수감자는 산 채로 소각장에 던져졌다고 한다.] 회스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학살 준비실에서 탈의를 하던 희생자들이 학살 사실을 눈치채고 SS에게 저항하여 무기를 빼앗고 총격전을 벌였던 사건도 있었다.[*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9장 6편 학살. 나치는 유대인을 게토에서 수용소로 보낼 때 모든 짐을 싸들고 나오게 만들어 수거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편의주의와 잔인무도함을 동시에 실천했다. 이렇게 하면 굳이 남은 물건 수집하러 게토를 뒤질 필요가 없다. 게토 소개 시 짐을 싸게 한 다음 가방에 이름을 쓰게 했고, 그 짐들은 별도의 열차로 옮길 테니 두고 가라고 한 다음, [[유대인 경찰]]들을 시켜 분류해 털어갔다. 의류의 경우 전시 경제 체제로 인해 의류 공급에 제약을 받던 민간인들을 위한 중고 의류 수요를 채우거나, 개조 등을 통해 군용 피복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탈의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면 고체 치클론 B를 굴뚝을 통해 주입해서 살해했는데, 농도와 인원에 따라 3분에서 3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쥐'에 수록된 존더코만도의 증언[* 출처는 쥐 합본 233~236페이지로 작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버지가 존더코만도에게 들은 증언을 넣었다.]에 따르면 시체는 주로 유일한 탈출구인 문 앞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위에는 힘센 남자가 있었고 그 아래로 약한 노인이나 아이들이 아래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학살이 끝난 후 당연하게도 시체를 독일인이 만지기는 싫었으므로, 뒤처리는 유대인 특수직무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 시신은 머리카락과 금니 같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뺀 후 처리했는데, 처음에는 매장했으나 [[카틴 학살]] 현장을 발굴한 뒤 매장은 훗날 쉽게 발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홀로코스트]]를 은폐하기 위해 소각로에 넣어 화장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매장된 시신도 도로 파내어 소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이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감독하던 한 무장친위대 [[하사]]가 [[PTSD|반쯤 미쳐서 비명을 질러대고 권총을 소각장에 난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x_od2YfftD4|#(1분 30초 무렵, 성인 인증 필요)]] 죽일 때는 그렇게 신나게 죽여놓고도 이런 짓은 맨정신으로는 못 버틸 정도로 끔찍했던 것이다.[* 이 하사가 독일어로 소리지르는 장면은 일부러 번역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내보냈는데, '''"So ist es! Walhalla! Walhalla laeuft hier!(바로 이거야! 발할라라고! 발할라가 여기 도래했어!)"'''라는 뜻이다. 배우는 노어베르트 바이서(Norbert Weisser)로,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 [[아돌프 히틀러]] 역(목소리 출연), [[브레이킹 배드]]에서 독일계 조직원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원래 유대인들을 독가스로 죽이자는 발상을 한 것부터가 총살로 처리했더니 처형 작업에 동원된 [[장병]]들이 막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폴란드인을 혐오하던 친나치적 성향의 [[군인]]들이라도, 무력한 민간인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총살하는 건 일부 사이코패스를 제외하면 엄청난 정신적 압박일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 군인들이 가장 충격을 받는 요소는 의외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거부감이다.] 독가스로 대체된 후로도 너무나 비인도적인 수용소 현실에 처음 배치된 인력들은 경악하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았지만 대개는 다른 장병들의 폭력, 협박에 손쉽게 굴복했다. 이후 존더코만도들을 동원하면서 자신들이 직접 무언가를 하는 일은 줄어들었고, 감독 역할 정도만 했다. 그나마 화덕으로 화장을 하는 방법은 덜 죽일 때 이야기이고, 전쟁 말에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 끌고 온 유대인까지 대량 학살할 때는 화덕이 모자라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넣어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독일의 동맹국들인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 대량의 유대인들이 잡혀왔다. 특히 헝가리는 1944년까지 유대인 학살을 하지 않았고, 같은 추축국이라 전쟁 중인 소련이나 영국으로 탈출하는 것보다는 수십 배는 탈출하기 쉬워서 많은 유대인들이 헝가리로 탈출했다. 그러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실권을 잃고[* 호르티는 추축국의 일원이었지만 국내 파시스트를 탄압한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파시스트인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한 44년부터는 헝가리도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이렇게 잡혀온 헝가리 유대인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 그 결과 아우슈비츠의 수용 인원을 초과하는 인원이 실려 들어왔고, 시시각각 악화되는 동부 전선의 상황 속에서 수용소를 운영할 물적, 심적 여유가 부족했던 나치는 거의 대부분의 입소자를 가스실에서 바로바로 처리했다. 이를 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거대한 규모의 샤워실을 빙자한 가스실들이 증축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전쟁 초반에는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탈리아 본국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유대인들도 보호되었다. 무솔리니는 독일과 다르게 다문화 제국 정책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독일의 부하 국가가 아니니 고분고분 따르진 않겠다는 일종의 자존적인 표현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고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수립되어 독일군이 직접적 영향력하에 들어간 후로는 이탈리아 유대인들도 예외없이 학살당했다. 이탈리아 유대인들은 우선 중간 계류지 역할을 하는 집결 수용소인 볼차노 수용소에 잠시 수용되었다가 다하우, 라벤스베르크, 아우슈비츠 같은 노동 또는 절멸 수용소들로 보내졌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바로 이 일을 소재로 한 영화다. 그리고 발칸 반도 점령지들의 유대인들은 우스타샤나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학살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